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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안초등학교

연인들을 위한 애창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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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애린 조회 684회 작성일 08-02-11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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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태운 차는 고향의 중턱을 단번에 꺾지 못한다. 

오르막은 급하고  모퉁이를 휘어 도는 도로는 각을 세웠다. 연결되지 않았던 길을 생각해 보라고, 얼마나 반듯해졌냐고, 아무리 긍정을 끼워 맞춰도 우리는 냉정하게 과거를 지우고 편리에 익숙해져 버렸다.


웃서고지 오르는 길은 부도 앞바다에도 훤히 보였다.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우리가 다시 뭍으로 떠나기 위해 여객선을 기다리던 부도 앞 종선에서, 엄마의 마음을 유추할 수 있었던 건, 돌담에 기대어 반쯤 허리를 굽힌 채 꼼짝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 때문이었다. 울컥 차오르는 슬픔을 깨물며 나는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엄마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다른 길을 돌아볼 여지가 없다는 것은, 쉽게 이탈을 꿈꿀 통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가족은 온 힘을 다해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하얀 카라가 빛나는 교복을 입고* 이 길을 걸어 집으로 올라갈 때면 주변에서 밭일을 하시던 동네 어른들은 “아이고, 이제 시집가도 되겠다.”라고 놀리곤 하셨다. 그때 내 키는 해가 바뀔 때마다 10cm씩 자라서 먼저 커버린 친구들을 거의 따돌리고 있었다. 


이쯤 어딘가에 엄마가 일구던 작은 밭이 있었다. 내가 밭에 가는 날은 심부름으로 오이나 가지를 따러 가는 날이었다. 가지 꽃이 하도 예뻐서 쪼그려 앉아 머뭇거리다가, 몇 개의 별이 갑자기 쏟아지는, 엄청난 통증에 아득해져 엉덩방아를 찍던 날이 있었다. 죽었다 생각했는데 다시 살아나 발견한 것은 왼손을 꽉 물고 있는 철망 상자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돌아온 나에게 엄마는 “하다 하다 이제는 쥐덫에 물리고 오냐”라고 버럭 화를 내시며, 너무도 간단하게 쥐덫의 주둥이를 벌리셨다. 이래저래 서러운 날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억새풀을 하러 낭끄터리에 가는 날이면 나를 앞세우셨다. 그러고는 온 바다에 깔린 은빛 윤슬과 한 몸이 되어 출렁이는 억새꽃을 담아 오게 하셨다. * 억새풀을 풀어놓고 뒷마당에 앉아 한가롭게 이영을 엮으시다가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급하게 목소리를 높여 나를 부르셨다. 


어제의 노을이 오늘의 자리에 없음을 발견하게 했던, 유년의 높다란 새랍이 보인다. 바로 그 높이에서 왼쪽 담을 꺾어 나오면 웃샘으로 이어지던 비탈길은, 곧장 직진하는 대나무 습성에 온전히 침식되고, 돌담을 따라 안도로 오르던 길은, 잡목들의 자리다툼에 영토를 잃었다.


틈만 나면 돌담을 키우시던 우리 할아버지가 앉았던 돌의자에 넝쿨이 번졌다. 돌의자에 앉아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게 시조를 읊으시던 할아버지도 사라졌다. 그 모든 것을 지우는 것은 결국 세월의 힘이라고, 할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일까. 그래서 그리도 미지근한 발자국만 남기고 떠나신 것일까.


도로 끝에 하차한 우리는 다시 옷매무새를 고치고 장화를 신는다. 바로 건너편에 동백낭구숲이 보인다. 아니, 그보다 먼저 아치 터널이 보인다. 대대로 이어온 동백낭구숲이 움푹 패이는 동안, 힐끔 쳐다보고 가볍게 스쳤으면 그만이라는 핀잔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온다. 거대 기류는 무엇에 쫓기어 두고두고 치유할 수 없는 생채기를 저리도 또렷하게 남긴 것일까. 새로운 풍경이 너무 선명해서 그곳에서 꿈을 키우며 무럭무럭 자라던 우리의 추억을 찾을 수 없다.


제멋대로 뻗어버린 생각의 잔가지를 밀치며 아치 터널을 빠져나간다. 제초기가 들풀을 스친 자국들이 가지런히 도열된 길을 따라 오른다. 불쑥 고개를 내민 삐비꽃이 보이고, 지난해 돌아가신 큰 아버지 무덤이 보인다. 그리고 흠뻑 젖은 채로 무덤가에 철조망을 치고 계신 사촌 오빠가 보인다.


“형님 우리 막둥이 두고 갈까요?”


“아이고 됐네, 내가 오히려 그 막둥이 치다꺼리할 걸세”


어리둥절하던 우리 막네, 살짝 벙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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