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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몽안 조회 273회 작성일 08-03-2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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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렁길 2코스 


파란색이 조화를 의미한다면, 초록은 생명이다.

해가 정오를 스쳐 기울기 시작했는데도 초포의 초록은 유별난 유혹이다. 대부능선을 보아도, 안산을 보아도, 초록만으로 명과 암을 이룬 눈부신 유화다.


썰물에 드러난 바닷가는 늙은 아낙의 손길에 들썩이고 나로도가 졸리는 듯 아련하다.

1코스를 걷다가 작은 돌멩이에 치인 내 발의 통증이 다리를 타고 오른다. 내색했다간 비렁길 2코스는 문을 닫을 게 뻔하다. 어떤 목적 앞에서 이해를 구하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가짐이 EQ 여야 설득력이 높다.


훤히 밀려간 바다 덕분에 초포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의 혈관을 본다. 아직은 맑고 창창하다. 저 물은 본시 바다의 것, 바다가 되려고 문바위와 어드미의 수원지를 거쳐 상거리, 큰장안을 타고 온 힘을 다해 내려왔다. 그런데 바다는 하필 썰물 중이다. 다 왔다는 안도도 없이 물은 흘러간다. 


저 강렬한 열망으로 짠물과 몸을 섞고는, 먼바다에서 파랑을 만나면 비로소 현실을 깨닫고 예까지 한걸음에 달려오고 싶을 것이다. 그러다 운 좋게 초포항을 스치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 초포다리 난간을 타고 올라 먼데 산을 바라보기도 하고, 바다가 되고 싶었던 순간을 잊고, 또다시 모천회귀를 꿈꿀 것이다.


초포 사람들의 여름 동화가 머문 다리를 건너 비렁길 2코스 입구에 다다르자, 초포 굴등간 도로개설 공로비가 있다. 1971년부터 8명의 주민이 주축이 되어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괭이와 지렛대 그리고 온몸과 열정만으로 1.7KM 구간을 개통시키신 것을 기념하여 공로비를 건립했다는 공로비 문구를 읽는 순간, 약간의 전율이 숙연하게 한다. 그들이 만들어둔 길을 편하게 걷는 것이 고마우면, 우리는 좀 더 자세히 이 길을 보아야 한다. 


초포에서 직포마을까지는 3.5KM로 비렁길 코스 중에는 비교적 잛은 코스지만, 망바위, 가는고지, 동매, 굴등막끝, 촛대바위, 새밭골, 연목머들, 직포 노송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해안길이 있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동안 안산의 밑둥치는 제 속을 훤히 드러내주고, 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멈추지 않는다. 콩짜개란은 여기서도 무성하다. 바위에도, 나무에도, 작은 돌멩이에도, 이들의 번식은 참으로 질기고 푸르다. 그 질긴 나무들의 성장이 길을 향해 가지를 뻗어 길의 지붕을 만들고 그늘을 만들었다. 9년 전 직포에서 굴등 마을을 지나 초포가 훤히 보이는 이 길 끝에서 내려다본 적이 있었다. 그때 없던 풍경이 채워져도 낯 섬은 아주 잠깐이다.

 

철 모른 동백꽃을 발견한 순간 춘북이 보인다. 가끔 친구가 사진으로 보내줘서 춘북 철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춘북은 부인과 질환의 한약재로 사용된다고 하는데, 동백꽃이 떨어지고 맺은 동백 열매가 여물지 못하는 돌연변이로 생겨난다. 섬 아이들이 자연 간식이 되기도 했는데, 그때도 어쩌다 하나 보일까 말까 할 정도로 흔하지는 않았다.


어느새 초록담장이 열리고 볕이 가득한 길을 걷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면 이제는 사라진 가는고지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입구는 보이는데 집이 보이지 않고, 다랭이 논이 많았다는데, 돌담이 보이지 않는다. 숲이 야금야금 먹어치운 자리에는 온통 숲만 있다. 걸음만이 숲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나와서 오른쪽 바다를 보면 신선대, 용머리, 개도, 마전등이 보인다. 그리고 대부산 능선 따라 병풍바위가 보이고, 기차바위가 초록에 겨우 얼굴을 내민다. 9년 전 모습과는 너무 비교가 되는, 초록에 의한 침몰이다

  

비렁길 2코스의 조망의 소유주는 온전히 비렁길 2코스의 것이다. 이어진 길도, 방금 도착한 굴등도, 굴등의 하얀색 돌담도, 굴등 마을 사람들이 가꾼 화단도, 낡아 곧 쓰러질 것 같은 외양간도, 그 외양간을 오른쪽에 두고 굴등 전망대로 내려가는 데크 계단도.....


굴등 전망대의 속내를 알려면 계단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굴등 막끝터리 바위에 위치한 굴등 전망대 왼쪽에는 굴등통안이 있고, 좀더 멀리에는 매봉과 자연 방파제라 불린 갈바람통이 보인다. 바다에서 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해식애와 해식대지가 보이지 않는다.


다시 굴등 마을 계단 정수리에 도착하면, 맞은편 내리막에 있는 첫 집이 2005년 개봉한 혈의 누 촬영 장소라고 하는데, 마을에서는 그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집 주인의 지난 행적이 더 유명하다. 부친의 호된 교육법을 거스르지 않고, 끝없는 노력으로 서울 명문대를 나와 범인凡人이 누릴 수 없는 경지까지 이르게 되셨다고 한다.


숲에 가린 굴등 앞바다를 가늠하기 좋은 시간은 새벽이다. 잠결의 무방비를 급습한 어선의 소란은 지금 머문 곳의 위치를 설명한다. 심장 약한 사람들이 단단해진 까닭은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 기운으로 그곳의 사람들은 오지의 내력을 극복하고 멀고도 높은 곳까지 뻗어갈 수 있었던 것일까...돌담과 돌담사이, 그 손길이 만들어낸 미의 관점도 본연의 사색 아니면 어렵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낸 공간이 없다. 하다못해 쓰러지다만 시멘트벽도 멋스럽다.


아랫집 뒤란 담장과 맞물린 오솔길을 걸으면 오르막이다. 오르막을 견딜 수 있는 것은 그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늘은 언제나 시야를 좁게 한다. 부모님 그늘이 그렇고, 의지의 대상이 그렇다. 하지만 사람들의 나약한 마음속에 뿌리내린 비빌 언덕은, 그나마도 없는 사람들의 공정을 방해한다. 그럼에도 끝내 일어선 사람들의 진술로 세상은 바뀌고 세상을 설득하다. 하지만 초록에 밀린 굴등은 9년 전에 보았던 풍경을 잃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는 고귀한 희생을 놓칠 수 있다. 어느 폭풍우에 넘어졌는지 소사나무 한 그루 겨우 밑동만 생명을 들키는데, 사망 진단서가 나올법한 몸통은 무너진 길을 지탱한다. 이 순간 내가 성의를 다하는 것은, 그의 존재를 가볍게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빠른 정보를 습득해도 초행길은 두려움의 길이다. 그 길을 걷다가 자연스럽게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금오도 비렁길이 그렇다. 그래서 마주 오는 사람들에게 서로 인사를 한다." 반갑습니다. 좋은 여행되세요."

 

어느새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촛대바위 전망대이다. 촛대바위를 살피다가 다른 각도에서 촛대바위를 본다. 내 눈에는 영락없는 동물상, 고릴라로 보인다. 얼굴이 보이고 움츠린 몸이 보인다. 그러다가 이름을 얻지 못한 주변 바위를 본다. 촛대바위를 지탱하고 있는 바위도, 그 바위를 연결해서 배경이 되어준 바위도 스치는 눈길에게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촛대바위의 유명을 이끈 완전한 조연이다.


이제 모든 길은 내리막이다. 내리막에서는 오르막을 걱정하고, 오르막에서는 내리막을 걱정한다. 걱정의 몸통은 미래에 있는데, 평생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오래 전 친구들과 새벽에 깨어나 이 고개를 넘으며 다시 만날 수 없는 풍경을 만났다. 그 작은 것을 놓친다 하더라도 다른 풍경이 채워져서 미련은 남지 않는다. 하지만 미련이란 것은 내가 그것에 대한 실체를 확인할 때 가능한 것이다. 내가 현재 찍은 사진을 보며 변화를 발견할 때, 장면과 장면의 다름을 안타까워하며 그때의 걸음을 다행으로 여길 때, 미련은 길을 잃는다.


낡아 삐걱거린 데크 길을 걸어왔는데, 9년 전 친구들과 하룻밤 지샜던 숙소를 찾을 수 없다.

풍경이 변했거나, 내 기억이 흐려졌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에 잠겨 걸어가고 있는데

모자를 흠뻑 뒤집어쓴 아낙이 나를  막 스치는가 싶더니 급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


“세상에, 우리 서울에서는 잘 못 만나면서 고향에서 자주 만나네~!”


우리는 얼싸안고 기뻐했다.

생각해보니 고향만 내려오면 그 친구를 만났다.

친구도 나만큼이나 비렁길이 좋은가 보다. 아니, 고향이 좋은가 보다.

저 우람한 직포 노송 같은 뚝심이 우리에게도 있었나 보다.

그러나...보다......




감사합니다.





완전한 무방비가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상대도 해맑아야 한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고향을 참 좋아했다.

유년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

그리움으로 가득했던 고향...

떠날 수밖에 없는 고향....

어떤 방법으로든 떠날 수밖에 없는 고향......


고향에 도착해서 이방인으로 느껴진다면

고향은 고향의 가치를 잃는다.


부족해도 다정하게

낯설어도 살갑게

고독해도 진실하게

텅 비어도 편안하게

우리들의 고향 홈이 오래오래

든든한 실향민의 기둥이 되길 소망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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