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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속의 여남국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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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산수 조회 246회 작성일 24-04-19 23:10

본문

고향을 찾을 때면 먼 발치에서 건 가까이 다가서건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게 되는 나의 모교 여남초등학교,,

지금 푸른 잔디에 멋진 조경을 갖춘 운동장과 곱게 채색된 학교 건물이 평일 낮임에도 조용한 채 적막감 속에 묻혀있는 모습과 겹쳐 과거 내가 다니던 때의 허름한 목조 건물과 흙먼지 날리던 운동장에 학생들로 시끌벅적하던 모교를 떠올려 보면 한 여름밤의 꿈을 꾸다 깬 것처럼 헛헛한 기분이 들곤 한다. 

8살이 된던 해 3월 설레임 반 두려움 반 떨리는 심정으로 여남국민학교 입학을 하고 내 생애중 가장 푸르고 꿈많던 유소년기 6년간을 몸담았던 곳. 
입학 전날 쏟아졌던 봄비에 밭징개 내리막길이 진흙 구렁이 되어 할머니 등에 업혀 조심스레 등교하여 학교 운동장에서 뵈었던 담임선생님은 몇년전까지 고향 심포에서 평온한 노년을 보내셨다.

그때는 코흘리개들도 많았는지 콧물닦는 항가치를 접어 왼쪽가슴 큼지막한 이름표 뒤에 달고 다녔다. 코흘리게 오줌싸게 머리통에 난 부스럼은 활동량에 비해 먹는 게 부실해 생긴 "영양실조에서 오는 누수현상"일거라며 오래전 금오홈 게시글에서 본적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와 닿는 말이다. 교실에서 담임선생님이 배부해 준 교재를 받고 필기구들은 개인이 준비하여 그것들을 5학년때까지 책보자기에 싸서 다녔다. 비오는 날이면 책보자기를 허리에 둘러묶어 뛰어가는동안 필통속 덜그럭거리던 연필심은 죄다 부러졌다. 몇번 그런일이 있고보면 새연필도 금방 몽당연필이 되기 일쑤였는데 집에서 돈이없어 또 사줄 수 없다는 꾸지람을 듣고 방과후면 빈밭을 다니며 보리이삭을 줍거나 산과 들로 인동초꽃을 따서 팔아 돈을 마련해야 했다. 나와같은 처지의 아이들 몇몇은 교실바닥 밑으로 기어 들어가 연필이며 지우개,잣대,볼펜,크레용까지 한웅큼씩 주워 나오기도 했다.교실바닥 판자가 오래돼 틈새가 벌어진 곳이 많았는데 일부 학용품이 그리로 굴러가 떨어진 것이다.그 안에서 동전까지 주웠다며 자랑하던 아이도 있었다. 오후수업을 시작하던 3학년 때던가 학교에서 점심급식으로 강냉이떡을 나눠 주었다.학교에서 직접 강냉이가루를 큰 솥에 쪄서 만든 떡으로 마치 여수 서시장 입구에서 파는 막걸리빵 비슷한 모양에 더 노랗고 강냉이 특유의 고소한 맛이 있었다.그런데 식칼로 대충 잘라 어떤것은 크고 작고 차이가 심해 떡 배급시 신경이 쓰였고 작은것을 받게되면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크건 작건간 그 떡은 고픈배를 채워주지는 못했다. 


교실복도 뒷편에 키가크고 오래된 벚나무가 몇구루 서 있었는데 초여름이면 검고 굵은 버찌가 많이 열려 배고픈 아이들의 훌륭한 간식거리가 돼 주었다.아이들이 땅에 떨어진 버찌를 한컵씩 주워 수돗가에 가서 씻어먹기도 하고 나무에 올라가 따 먹기도 했다. 키가 큰 거목들이라 주로 높은가지에 많이 달려있어 바로옆 건물 유리창을 의식해 돌을 던질수는 없어 신고있던 고무신을 벗어 던져 떨어진 놈을 주워 먹었다. 금방 떨어진 버찌는 싱싱하면서 맛도있어 좋았으나 문제는 던진 신발이 높은 나뭇가지에 걸려 안내려 올 때였다. 나무위에 그렇게 걸려있는 다른 고무신도 많았는데 마냥 위를 쳐다보며 안절부절 애태우는 동안 선생님한테 들켜 교무실에 잡혀가 벌을 서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얼마 후 강냉이떡은 포대건빵으로 대체되었고 그 건빵은 작은 되로 공평하게 분배 되었기에 강냉이떡 배급때 같은 불만은 없었다.수돗물을 떠와 건빵을 담가두면 금방 서너배로 불어났고 나는 주로 그렇게 해서 먹었다.전교생이 직포 바닷가 노송밑으로 소풍겸 피서를 갔을때도 건빵포대를 둘러메고 갔었다.평소 큼지막한 건빵푸대 부피에 비례해 충분한양이 배급되어 학교길에 떨어진 건빵을 지나가던 개가 주워먹기도 했다.


학생수 1000명 시대의 여남국민학교는 교사들도 많았고 학교규율 또한 엄격한 편이어서 말 안 듣고, 지각하고, 담을 넘어가 땡땡이치고, 숙제 안 해오는 등 그런 아이들은 선생님의 사랑의 매를 피해갈 순 없었다. 매로 종아리 또는 손바닥을 맞거나 교실 뒤에 가서 의자들고 서있는 체벌을 받았다. 급우들 또한 서열 다툼이 잦았는데 마치 영화 '말죽거리잔혹사" 에서처럼  학교 뒷편, 골목같은 으슥한 곳에 몰려가서 명예로운 일전불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승리자가 되면 약하고 서열 낮은 아이들을 쫄병처럼 부려먹을수 있는 특혜를 누리기 쉬웠다. 


창가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다 이쁜 여선생님으로부터 쥐어박힌 알밤에 정신이 번쩍 나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많은 학생수에 걸맞게 학교 운동장은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로 시끌벅쩍 했다. 주로 등교후 수업시간 전까지 아침시간과 점심시간은 아이들 천국으로 옷을 버리기 쉬운 흙마당임에도 공놀이, 다마치기 ,패치기, 꼬쟁이치기, 사방치기, 가이산, 고무줄놀이등 곳곳에서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놀이문화의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지금보면 가히 크지않은 운동장인데 가을운동회때면 만국기 펄럭이는 하늘아래 그 속에서 청.백군으로 나눠 각축전을 벌이고, 응원 함성도 지르고, 마을별 잔치도 열고 음식류와 생필품 파는 상인들까지 운동장가를 차지하고도 모자람이 없었다. 건너편 파출소건물 앞에서 바라보는 뒤덮힌 만국기속에 여남국민학교 가을운동회 모습은 그앞의 바닷물빛과 조화되어 꿈결같은 그림속 풍경을 그려냈다. 


내 생애 그모습을 언제다시 볼수 있을까. 지금은 많은세월이 흘러 학교목조건물과 흙바닥 운동장은 새롭게 일신되었지만 운동장 옆의 응원석 계단은 낡은채 오래된 나무 몇그루와 함께 그자리를 지키고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반세기 전 내가 다니던 모교 여남국민학교..지금의 학생수 감소로 다소 어려움속에 있지만 오뚜기처럼 딛고 일어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를 소망해 본다. 

댓글목록

향기님의 댓글

향기 작성일

산수님의 추억의 여남국민학교때 를 읽고 내려가니 같은 학년이었거나

한 학년 위 분이가? 생각하게되네요~

그때는 그랬었지요~

지금도 그립고 꼭 한번 먹고싶은 떡이 급식으로 나누어 주었던 강냉이떡이랍니다.

교장선생님 사택 앞에 강냉이떡을 찌는곳이 있었고 소사 아저씨가 찌셨던거 같습니다

각반의 급장이 은색 바께스를 들고 가서 반에 강냉이떡을 타오면 급장이 나누어 주곤 했었지요

어쩌다가 큰 것을 받은 친구는 좋아라했고 작은것을 받은 친구는 급장한테 난 왜 작은걸 주냐고

뭐라 하기도 했지요~그 때 우리반 급장은 먼저 하늘나라로 가고 없네요~참 똑똑하고 착한 친구였는데...

저는 막내여서 부산에 계시는 오빠가 빨간가방을 사주셨었는데 자크를 쭈욱 열면

양쪽으로 열리는 가방이었지요.급장이 주는 강냉이떡을 하나 받고 우리집이 학교와 가까워서

하숙을 하시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선생님께서 선생님 몫인지 하나를 더 주셔서 가방에 넣고 쟈크를

잠그려는 순간 쟈크가 터져버린거에요~그 후 가방을 들고 다니지 못했던거 같네요

그립고 먹고 싶은것이 강냉이떡~ 어느 날 유튜브에 강냉이떡을 검색해서  찾아보았습니다.

어느 분이 추억의 강냉이떡 가루를 파시는 분이 있드라구요~올 해 가기전에 그 가루를 사서 꼭 쪄서 먹고싶네요~

추억의 글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편밤 되세요~66

<span class="guest">산수</span>님의 댓글의 댓글

산수 작성일

그때의 강냉이떡에 대해 이토록 자세히 아시다니 행복감마저 드는군요.

 얼마나 맛나게 먹었던지 나역시 오랫동안 생각나던 떡이었지요.

 배가 고팠던 시절에 먹었던 떡이라 그런걸까요? 

 같이 먹었던 다른떡도 그래야 하는데 확실히 달랐던것 같습니다.

 주신 댓글 보니 우린 비슷한 연배 맞는것 같네요.

 꽃보다 향기라더니

 다소 길면서 빼곡한 글을 끝까지 보시고 댓글까지 주시니

 님의 향기롭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니신 분일걸 알겠습니다.

 지금 여수는 비가옵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요.^^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세상에 이렇게 소중한 추억을 올려주시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여남 초등학교는 나오지 않았어도

잃어버릴 뻔한 항가치의 애잔한 기억과

엄마가 사다준신 만화그림 빨간 책가방을 매고

홀로 입학도 하기 전에 산길에 올라 

초등학교까지 가보았던 기억이 살아나

한참 먹먹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자주 오시어 귀한 기억들 많이 풀어주세요.

<span class="guest">산수</span>님의 댓글의 댓글

산수 작성일

감사합니다. 좋은하루 되세요.^^

<span class="guest">향기</span>님의 댓글의 댓글

향기 작성일

여수도 비가 왔나봅니다.

이곳 웃녘도 하루 종일 비가 내리네요~^^

옥상 화분에 고춧모 8개 사와서

심어 놓았으니 잘 자라겠네요~

호박 4개 오이 4개는 내일 심어야겠네요~

강냉이떡 이 후 건빵을 주었었지요~

방학되기 전 날에는 서너대씩 주었던거 같습니다.

후라이팬에 살짝 구워 먹으면 더 맛났었지요~^^

가끔 추억을 소환 할 수 있도록 

추억의 글 기다하겠습니다~^^

<span class="guest">미리내</span>님의 댓글

미리내 작성일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들으며

잠시 홈에 왔습니다.

오빠들이 조금 남겨다 입에 넣어주는 전지분유덩어리가 너무나 맛났습니다. 나도 얼른 학교 가고픈데 몸이 약하여 못 가다가 입학하니

도서실 뒤 조그만 건물에서

맛난 냄새를 날리다

드디어 맛 본 그 옥수수 빵

신세계였지요

나도 오빠들처럼 남겨다

막내동생 입에 넣어줬었지요

그 동생은 7살에 입학해버렸지만

옥수수떡 시대는 끝나고 건빵시대가 되고 말았답니다.~~

돌아가서 뵈요^&

<span class="guest">산수</span>님의 댓글의 댓글

산수 작성일

미리내님도 강냉이떡 기억을 간직하고 계셨네요.

수이 잊혀지지 않는 맛이었던건 사실인것 같습니다.

고향홈에 울 여남국민학교 출신분들도 많은것 같아

기분이 넘 좋습니다.^^

행복한 귀환을 바랍니다

오아시스님의 댓글

오아시스 작성일

드뎌~~~~~

건빵 세대 나타났습니다 ㅎ

3학년까지 담임 선생님이 교감을 겸직해서 우리반을

맡았지요

 어린애들에게 공평하게 한바가지씩 주셨으면 좋으련만

산수문제를 못 풀면 내 몫을 다른친구들이

가져갔습니다

분유향이 섞인듯 고소한 냄세는 지금도

기억의 언저리에 맴돌고있네요^^

그 때 시스양은 받았느냐고요~~?ㅋ

그 후로

산수,수학만 올 수ㆍ우를 받았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추억을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span class="guest">산수</span>님의 댓글의 댓글

산수 작성일

아~ 드뎌 건빵세대분이 오셨네요.

반갑고 환영합니다.ㅎ

오아시스님은 고향홈의 여류문학 꿈나무이자

앞으로 고향홈 기대주로 관심있게 보고 있습니다.

방문 댓글 남겨주셔 감사합니다.^^

안개님의 댓글

안개 작성일

고향방문을 할때면

모교인 두모국민학교를 스쳐 지나게 됩니다

유소년기의 푸르름과 함성으로 가득 했던 곳이 지금은 폐교로 잡초만이 무성한 흉물스런곳이 되어 버려 가슴이 아픕니다.

저는,분유와 옥수수빵을 먹었던 기억은 가물거리고 건빵을 받았습니다

담임선생님 사택 청소를 맡아서 남들보다

건빵을 많이 받아 왔는데

식구가 많다 보니 배고품을 달래주는 간식거리로 최고였습니다.

지금도 가끔 추억의 건빵이 생각 날때가 있습니다.

마트에 가서 건빵이 보이면 한봉지 집어와

먹어 보지만 그 때 그 맛이 아니더군요.

산수님의 잔잔한 감성으로 소환해 주신 추억속의 여남국민하교 시절 백배공감 합니다.

좋은글 많이 부탁 드립니다.




<span class="guest">산수</span>님의 댓글의 댓글

산수 작성일

반가운 안개님 오셨네요^^

저도 두모국민학교 폐교를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내 가장 친했던 단짝친구 포함 친구 두명이 그 학교 출신이었어요.

국민학교 6학년때 종합운동회 배구 결승에서 만난 상대팀이 두모교였는데 

파워와 기량에서 최강팀으로 자신했던 우리 여남교가 두모교에 지고 말았답니다.

그때 두모교 세타로 공격수 두명에게 자유자재로 정확히 토스해주던 선수가 있었는데

작은 키에 희고 여자애처럼 곱상한 애로.. 코치선생님도 그선수 때문에 졌다고 탄식하셨지요. 

그런데 중학교 입학했을때 그애가 내 옆자리 짝꿍이 된거여요. 내가 25번 걔가 26번..

처음엔 나랑 자주 다투었지만 점차 사이가 좋아져서 점심시간때 같이 공놀이도 하고..

그아이도 나처럼 빼낑이 도시락을 자주 싸왔는데 점심시간때 먹으면 달라고 손벌리는 애들이 많아

 내껀 오전에 그애껀 점심시간 뒤에 먹었답니다.

수업시간에 양볼따구에 넣고 오물거리다 선생님한테 들겨 혼나기도 했고..

토요일 우리집에 같이와 같이 노랑바구로 낚시도 가고 나도 그 친구따라 초포 저수지에 붕어낚으러도 몇번 갔었지요.

저수지 낚시갈때는 삼거리살던 친구도 같이 왔는데 ,멋진 모습의 두모교도 놀러가고...재미있었어요

그때 뽀얗고 예쁘게 생긴 여자애가 우리곁은 지나갔는데 삼거리친구가 불렀지만 살짝 돌아보곤 그냥 지나가더군요.저~ 위 감나무있는집에 사는 애라고.... 

삼거리 그 친구는 말도 재미있게 잘 했는데 초포 예쁜 여자애들 많다고 말만 했지 소개는 하나도 안해주더군요.ㅎㅎ

20대 후반까지 아주 친했던 그 친구들도 생각나고,, 함께한 시간들도 그립고..소중한 추억이 됐네요.

안개님 방문댓글 감사합니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그 이쁘던 소녀가 감나무님 언니셨을까요 ??

좀 용기있게 더 불러보시지 안타까워요 ㅎ

<span class="guest">산수</span>님의 댓글의 댓글

산수 작성일

긍게요. 그랬어야 했는데 후회되네요.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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