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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가는 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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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종희 조회 764회 작성일 23-10-03 09:5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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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주변에는 과 성숙으로 패버린 삐비*가 지천이다. 아쉬운 마음에 두리번거리는데 덜컥, 여물지 않은 삐비가 걸린다. 하나의 삐비가 눈에 익으니, 싱싱한 삐비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보이는 대로 뽑고 있는 나를 지켜보던 사촌 오빠는, 먹지도 않을 거면서 뭐 하려고 힘들게 뽑냐고 웃으신다. "안 먹어도 맛있고, 뽑기만 해도 배부른 것이 바로 삐비" 라는 말이 하마터면 세상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아버지 산소 가는 길중에 가장 힘든 구간은 지금부터다. 선두에 있는 오빠가 들풀을 밟고 잡목 가지를 쳐내며 전진해도, 5월 넝쿨들의 영역 다툼은 끝이 없다. 설상가상 수풀 속에 숨어있는 크고 작은 돌멩이들은 밟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우리를 넘어뜨릴 듯 위태롭다. 그 속에 파충류가 꿈틀거린다 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사방은 완연한 초록이다. 그 틈에 희디흰 소복을 입은 찔레꽃*이 환하다. 나도 모르게 속도를 늦추자 한눈팔지 말라는 오빠의  목소리가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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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끊기자마자 인적을 지워버린 초록들은, 자신의 본능을 믿으며 묵묵히 종족번식에 몰입했을 것이다. 작은 사잇길을 두고 층층이 놓여있던 밭들은 모두 어디로 물러선 것일까. 그 밭을 떠받던 돌담 축대는 어느 안쪽을 지탱하고 있길래 또렷했던 경계선이 허물어진 것일까. 익숙했던 길들이 통째로 사라진 옛길의 실마리가 어렴풋이 풀리기만 해도 반갑고 고마워서 나는 금세 아는 척하며 두리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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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보름날이었는지, 얼큰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를 따라 이 길까지 걸어온 적이 있다. 아버지는 한사코 달을 향해 바로 서게 하고는 묻는 것이었다. 


"저 달 속에 뭐가 보이냐?" 

"아무것도 안 보여요!" 

"자세히 보아야지, 토끼가 두 마리나 있는데?"


텅 빈 달 속에서 토끼를 두 마리나 찾아내시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그때 어른이 되면 달 속의 토끼가 보일 거라고 확신했다. 아버지는 없는 사실을 함부로 말 한 적 없었으니까. 우리만 보면 좋아서 연신 입꼬리를 올리시던 아버지는 키에 비해 너무  사뿐히 걸어서 멋모르고 밟힌 개미마저도 무사할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안겨주신 부정의 힘 속에는 위태롭던 길을 반듯하게 펴게 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게 하는 마법이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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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을 헤치고 간신히 빠져나온 우리는 드디어 묵직한 그늘이 드리워진 숲으로 들어선다. 날로 울창한 숲은 아직 볕을 안으로 끌어들일 수 없어 잡목이나 넝쿨이 쉽게 번질 수 없다. 그 볕을 차단한 일등공신은 칡넝쿨이다. 나무의 바깥을 붙잡고 끝없이 위로 올라간 칡넝쿨 잎은, 바람에 팔랑일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까닭에, 나무는 간신히 볕을 들이키며 성장 속도를 이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동네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터를 잡은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너무 짙은 그늘을 오래 가두어서 그런지 낮은 돌담의 낯빛이 창백하고 부석 하다. 저 사잇길을 걸어 등교하던 사계절이 나에겐 있었다. 한 곳에 정착하면 안 되는 내 유년의 완고한 운명이 열어준 꿈같은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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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집이라 불리던 내 친구네 집은, 새랍으로 올라가는 돌계단부터가 가지런히 정돈된 안락이 있었다. 잘 가꾸어진 정원 안쪽으로 아래채가 누워있고, 위채는 몇 개의 계단을 오른 높이에 있었다. 위채에서 정면을 보면 성벽 같은 높다란 돌담이 있었고, 뒤로는 촘촘한 대나무 숲이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층계를 이룬 정원을 휘어 돌면 새랍이 있었다. 그 곁에 서 있던 돌배나무에서 하늘하늘 날리던 봄날은 너무 어지러운 흘림체로 고여 있어, 지금도 그 집을 생각하면 황홀한 멀미가 난다. 


윗집을 빠져나와 한참 동안 계단을 내려가면 우리가 살던 아랫집이 있었다. 아랫집 돌담 허리에 길이 있고, 길 아래 축대는 너무 견고해서 건너편에 자리 잡은 동백 숲이 가지를 길게 늘여도, 돌담에 드리워진 햇살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적막한 숲 속에 앞다투어 피어나던 꽃들과 돌담에 기대어 넝쿨 지던 포도 줄기, 그리고 막다른 길에 흘러넘치던 샘물과 길이 끊긴 언덕에 연분홍으로 흐드러진 복사꽃의 만개... 대대로 가꾸어오던 유서 깊은 그곳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것만큼이나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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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한 숲길 위에 앉아있는 하얀 꽃잎을 발견하곤 한참 동안 주위를 훑어보지만 꽃비를 날린 범인을 찾을 수 없다. 며칠간의 폭우로 질척거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낙엽이 흙이 되어가는 길은 너무 매끈하게 뻗어있다. 몰라보게 장성한 소나무 등줄기에는 마삭줄이 예쁘게 터를 잡았고, 몸집을 늘린 담쟁이는 오랜 기생의 세월을 들킨다. 안개가 소복이 내린 몽환의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호흡은 거칠어도 마음은 마냥 싱그럽다.


이 길을 따라 곧장 오르면 아버지 무덤이 있는 할머니 밭이 있다. 할머니랑 살던 어린 날, 잠시 다니러 오신 엄마 품에 잠들었다가 깨어나서는 너무 고요한 방을 급하게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흐릿한 이 길을 걸어 오른 산 언덕에서, 산과 한 몸으로 밀착해 있는 밭을 향해 목청껏 할머니를 부르고 엄마를 불렀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세상이 갑자기 까매지는 순간이었다. 그 까만 길을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날아서 내려왔다. 두려움에 끊긴 울음은 그런 것이라고 난생처음 알던 날, 날다 스친 가지에 베인 상처들이 곳곳을 쓰리게 했다. 그때 어른들은 자다가 사라진 나를 찾기 위해 허둥대며 새랍을 나서고 있었다.


수없이 오르내리며 눈으로 담아두었던 숲길의 옹이들은 빗물에 씻기고 나뭇잎에 가려 지워지고 없다. 어두운 기억에 사로잡혀 뽑히지 않던 흉터들도 세월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는 쇠락해질 때가 있다. 정말 그래야 살 수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데, 진물난 과거에 무심한 바람은 없다. 하지만 슬픔이라는 감정이 탄생한 유년이 있어 지금 나는 가슴 뭉클한 고향의 공기를 흡입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침묵이던 주위가 갑자기 왁자하다. 굵은 빗방울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 스며든 아침의 표면에 투명한 빗금을 그린다. 드디어 동생이 만들어준 비닐 우비가 존재감을 드러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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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도 에세이-----


*P-62 삐비/공명

*P-131찔레꽃 고향/쏨뱅이



<계속 >


 [고향으로 가는 길-1]


 [고향으로 가는 길-2]


 [고향으로 가는 길-3]


 [고향으로 가는 길-4]


 [고향으로 가는 길-5]


 [고향으로 가는 길-6]


 [고향으로 가는 길-7]


 [고향으로 가는 길-8]


댓글목록

이종희님의 댓글

이종희 작성일

고향으로 가는 길은
지난 5월 다녀온 고향을
현재 진행형으로 쓰면서
지난 기억들을
틈틈이 접목 시키고 있습니다.

단편으로 읽어도 무리없지만
새로운 분들을 위해
지난 글들을 아래에 붙여두었습니다.

조석의 기온차 잘 극복하시고
오늘도 파이팅하세요 ^^

<span class="guest">콩심이</span>님의 댓글

콩심이 작성일

고향은 언제나 포근합니다.
함께하는 님이 있고 고향집이 있어 언제나 감사합니다.
애린님~동생이 만들어준 비닐로 만든 우비는
실력을 발휘 했나요?ㅎ
오늘도 행복하세요^^~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고향으로 가는 길 [8]편에 쓰려고
아껴두었습니다ㅎㅎ
오늘도 즐겁게 지내세요~^^

<span class="guest">솔향채</span>님의 댓글

솔향채 작성일

고향가는 길
매 편마다 잼나게 읽고
잠시 추억을 소환해 보는 시간 갖습니다.
다 읽어보지도 않고 깜놀 했네요
첫 사진 삐삐 땜시ㅎㅎ
5월~~

고향지킴이로 살고 있어도
고향이라고들 하면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합니까

고향길은
맘만 먹으면 쉬우면서도
또 한편 어려운 발걸음이지요

계속되는
고향가는 길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멋진 오후되세요.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아... 그랬겠네요 ㅎㅎ
올해는 기온이 일찍 높아진 바람에
삐삐도 일찍 성숙했습니다 ㅎㅎ
고향으로 가는 길도
거의 끄트머리에 다가서네요
고향과 유년에 대한 글은
고향에서만은 너무 자유로워서
제가 너무 편하게 풀어냈습니다.

연휴 끝나고
이런저런 일도 숨 가쁘게 끝냈고
이번 주만 잠시 휴식해 보려고요.
오늘도 행복하세요
늘 감사합니다 ♡

<span class="guest">나건용</span>님의 댓글

나건용 작성일

우리 어렸을적 정서와 비슷해서 많은 공감이 갑니다. 고향의 풍경을 애리게 묘사하니 그 정서 속으로 퐁 빠진 느낌입니다. 선생님이 계시어 금오도는 외로울 일 없겠어요!
오늘도 금오도 사랑은 이어집니다. 오늘은 삐비꽃 말고 웃음꽃 활짝 펴 보시길 바랍니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실제 우리 고향이 좋아서
우리 고향에 안착하신 분이 계시다는
말씀을 들은 적 있습니다.

"아이고, 섬 구경이나 하다가 갈라 했드만
동네에 정이 들어 떠날 수가 없네~"
그러시면 참 좋겠다는 ㅎㅎ

걸어오신 님의 다양한 풍경을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늘은 삐비꽃이 시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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