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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가는 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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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종희 조회 932회 작성일 23-08-11 21:3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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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의 침묵을 깨뜨리는 이 카랑카랑한 울림은 사촌 큰언니 목소리다. 멀리서도 단숨에 몰입의  속도를 이끄는 언니의 언변은, 일흔을 넘긴 나이테를 언제나 당당하고 싱그럽게 한다. 우리 남매를 건너게 한 금오수도 파도 밭 걱정에 안절부절못했다는 언니는, 우리의 무사귀환 소식을 듣자마자 텃밭 푸성귀를 한 아름 뜯어, 큰오빠와 비바람 길을 걸어오셨다.


평생 장손의 무게를 걸쳐 매서 그런지 큰 오빠의 표정은 항상 묵직하다. 지난 윤달에 조상님 산소를 이장하고 산소 주변을 다듬느라 자주 섬에 내려오신다는데, 요즘 하는 일이란, 틈만 나면 새 잔디를 갈아엎는 멧돼지 때문에 산소 주변에 철조망을 치는 일이다. 우리 조상님은 다른 것도 아니고, 산짐승에 밀려 철조망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어하실까.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당신의 바람대로 아직도 높은 산자락을 호령하고 계신다. 우리 남매는 먼바다가 출렁이는 산밭에 묻어 달라는 아버지 유언을 거스를 수 없어, 이장을 결정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어쩌면 우리는 아버지 산소 벌초 덕분에 해마다 두 계절의 고향을 만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밤이 익어갈수록 술잔은 쓰디쓴 속내를 비우고, 우리의 이야기는 얼기설기 그물 짜기에 바쁘다. 먼 옛날 하나의 유전자가 나뉘고 분리되면서 우리 아버지는 어느 관문을 통과하셨기에, 그리도 유순한 이랑을 일구셨던 것일까. 큰 오빠는 큰집과 작은 집의 사뭇 다른 색채를 섞어보고 싶다는 아쉬움을 들키지만, 이 풍진세상을 함께 허우적거리며 헤엄쳐 온 우리는 이대로가 좋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의 선택은 없었어도,* 지금 우리의 우애는 휑한 욕심으로 서로를 보듬으며 나란히 걸어가고 있으니까.


점점 고요가 질펀해지는 이 섬에도 호황이던 시절이 있었단다. 50여 가구 밖에 없었던 서고지에,  200명이 넘는 인파가 움집한 60~70년대가 그랬다는, 큰언니 증언이 꼬리를 문다. 


신추, 마당널, 목넘, 역끄터리, 춘향이통, 뛰는통, 낭끄터리, 수박통, 갠박끝안, 골안, 팽널... 이런 원초적 지명에 가닿을 땐 느닷없는 웃음보가 폭죽처럼 터지지만, 빈지의 서늘한 한기는 여전히 푸른 경직을 몰고 온다. 사연 없는 무덤을 비켜 갈리 없는 독담불은, 지금 들어도 소름 돋는 애처로움이 있다. 그 옛날 아이들은 어쩌다 짧은 걸음을  늘리지 못하고, 바닷가 절벽 틈을 메우고 메워, 비 오는 날이면 아기 울음과 혼魂 불을* 선명하게 걸어두었는지.


덜커덩덜커덩 밤새 떠들어도 알아듣지 못할 비바람이 고향 집을 에워싼다. 이런 날엔 수직으로 내리꽂는 빗줄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우산은 제 옷을 거꾸로 뒤집어쓴 채 바람에 떠밀려 달아나기 일쑤 거나, 찢기고 부러져 맥을 놓는 경우가 허다했다.


가끔은 내가 술래였으면 좋겠다고, 지금은 숨바꼭질 중이라고, 아무리 긍정을 끼워 맞추려 해도, 세월은 익숙한 풍경이 안주했던 길을 지우고, 썰물이었던 사람들은 좀처럼 돌아오는 여객선을 타지 못했다.


섬의 아침은 밤의 시작만큼 이르다. 간밤 무섭게 유실되던 평온은 오간데 없고 동이 트기가 무섭게 적막하다. 비바람이 언제 깨어날지 몰라 서둘러 우비를 입는데, 한 벌이 부족하다. 동생이 커다란 비닐봉지에 구멍을 뚫더니 나더러 입으란다. 하긴 내가 산소에서 기껏 하는 일이란, 풀꽃들과 눈 맞춤하는 일이지.





계속



.....금오도 에세이.....


*P-37 인연/오아시스

*P-219 고향 뒷산의 부엉이/쏨뱅이



 [고향으로 가는 길-1]


 [고향으로 가는 길-2]


 [고향으로 가는 길-3]


 [고향으로 가는 길-4]


 [고향으로 가는 길-5]


 [고향으로 가는 길-6]


 [고향으로 가는 길-7]


 [고향으로 가는 길-8]


댓글목록

<span class="guest">금오도민</span>님의 댓글

금오도민 작성일

끝없는 이야기가 고향으로 이어지고
다시 과거와 아름다운 시절의 꿈으로 이어지고
그 뿌리가 이제 서로 이해와 사랑으로 이어지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나요?
고향으로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려운 길이기도 하지만
고향에 낭만과 추억이 있고 그곳에서의 행복이 있었고
지금도 거기에 있기에 찾아가는 것이 겠지요...
어찌보면 우리의 살아가는 인생과도 닮아 있는 길 같기도 하네요.
섬세하면서도 멋지게 쓰신 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얼마전 아는 사람들과 저마다 학창시절 힘들었던
통학 이야기 하다가 배타고 통학한 제 이야기에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못했는데요
그만큼 어려움도 많았지만 배움도 위안도 의지도 감사도
참 많아서 오늘도 고향 하늘을 뿌듯하게 접속했네요.
며칠 째 나락으로 뒹굴던 에너지가
좋은 말씀에 충전된 기분입니다.
편안한 휴일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

<span class="guest">솔향채</span>님의 댓글

솔향채 작성일

멀고도 가까운길
고향가는길~
고향을 방문한다는건 마음설레고 들뜨고
몇일째 아니 몇달전부터 준비하고
마음은 이미 일찌감치 고향에 내려와 있지요
몇시간을 차를 타고 배를 타고
그래도 피곤치 않은 이유는
어린시절의 추억, 부모님, 마을분들, 바닷가의 돌맹이 하나도 소중한
고향은 우리들의 마음을 풍성히 채워주는곳이기에
종희님
고향가는길 잼나게 잘 읽었네요
굿밤되세요^~^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정말 고향으로 내려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살아가던 시절도 있었네요.
비어가는 아쉬움이 점점 쌓여가고 있지만
그래도 추억하며 거닐 수 있는 고향이 있어
너무 행복합니다
그곳에 솔향채님 계셔서 든든하구요~♡
늘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span class="guest">감나무</span>님의 댓글

감나무 작성일

애린님의 글은 항상 서너번은 읽게 됩니다.
깊이 있고
섬세하고
짜임새 좋고
사람의 심금을 울리죠.

안개님의 댓글

안개 작성일

애린 작가님의 글
섬세하고 깊이 있죠~
따뜻함이 베어 있어 더 좋아 합니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

애린 작성일

감나무님
안개님 감사합니다
글을 쓰는 순간
길이 열리고 가고자 하는 곳에
제가 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요즘 좋은 두 분의 에너지
다양하게 이어가실 수 있기를 응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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