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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가는 길 [4]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종희 조회 833회 작성일 23-07-20 10:1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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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위축된 어구들이 나뒹구는 길을 걸어 고향집 대문을 열었다. 때마침 바람은 인기척을 비집고 화단의 나뭇가지들을 들추느라 부산하다.


고향집 나무들이 모조리 베어진 후로 한동안 우리 남매들의 마음도 몽땅 잘려나간 느낌이었다. 지루한 장마와 태풍을 견디며 끝내 달콤한 노을빛으로 완성되던 단감나무의 상실은, 동네분들에게도 너무 갑작스럽고 황망한 일이었다.


나무가 무성하여 음지로 변한 빈집의 기운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미친다는, 순전히 작은 아버지 노파심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는데, 나무를 바라보며 뿌듯해하시던 엄마를 기억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무엇으로도 보상되지 않았다. 더욱이 작은아버지의 예측과 달리 완전한 양지로 변한 고향집 마당은 환삼덩굴 차지가 되었고, 어느 해 여름은 여러 계단을 올라야 닿을 수 있는 현관문까지 빼곡하게 터를 잡는 바람에 오랜만에 도착한 우리를 아연케 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다시 심어진 과일나무는 당당하게 가지를 뻗더니 작년엔 제법 당도 높은 배를 잉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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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아버지 산소에 오르는 산길에 접어들 시간이지만, 지금 우리는 집 안팎을 쓸고 닦는 대청소에 몰입한다. 콸콸 쏟아지는 수돗물이 없었다면 여전히 샘물의  알량한 수위에 절망하며 최소의 물방울로 최대의 효과를 얻느라 비지땀을 보태고 있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고향집은 더욱 퇴화되었을 것이고, 그런 집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그저 눈으로 훑고 가는 고향의 풍경 속에 매몰되지 않았을까. 


새삼 이 옥수 같은 수돗물을 위해 아름다운 고향 집을 잃어야 했던 그니의 마음이 겹친다. 이미 밀림으로 번식했을 정든 길과 지척에서 지켜보던 우람한  문바위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했던 푸른 섬들과  부모형제 손때 묻은 문고리와 돌담에 피어있던 돌이끼까지, 얼마나 오랜 날 덜어내지 못한 그리움에 몸살을 앓으며 뒤척였을까...*


금이 간 시멘트 바닥을 뚫고 싹튼 백일홍이 하도 기특해서 마당 청소 담당인 오빠에게 부탁을 했건만, 마당은 다시 환해졌고 뽑힌 초록들은 보슬비 틈에서도 시들어가고 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담장에 뿌리내린 세 살배기 해송과 꿀벌이 다녀간 배나무, 그리고 석류나무, 사과나무는 작년보다 훨씬 무성해졌고, 건너편 미니 화단 대추나무는 의젓하게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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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장례식을 치르고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섬으로 내려온 우리 사 남매를 기다린 것은, 작은방 한 귀퉁이에 가지런히 서 있던 조선간장 네 병이었다. 엄마는 그때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이승의 남은 진을 모조리 짜내며 간장을 따랐을 것이다. 그렇게 엄마의 못다 한 육자배기를 나는 알지 못한 채 세월을 먹었고, 나의 육자배기는 온전히 이승의 몫으로 흩어지기를 갈망하며 마음길을 무던히 찾아 헤맸다.* 그런데도 엄마가 남긴 간장병을 아직도 비우지 못하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어디서 들어왔는지 박제된 벌레들이 구석마다 수두룩하다. 이런 조그마한 것들에게 무사하겠다며 막냇동생은 고향집에 올 때마다 텐트를 치고 자는데, 밤새 텐트 안에 갇힌 모기와 피를 나눈 형제가 되기도 하고, 아기 지내 한 마리와 사이좋은 숙면을 취하기도 하더니, 결국 우리가 쳐둔 모기장을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고향집 거실은 텐트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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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보관되었던 식기들을 헹구고 구석구석의 먼지들을 닦고 나니 어느새 저녁 준비할 시간이다. 때마침 마당이 왁자하다.




계속




-----금오도 에세이-----


*p-147 어드미는 아름다운 곳인데/김미자 

*p-204 육자배기/안개




 [고향으로 가는 길-1]


 [고향으로 가는 길-2]


 [고향으로 가는 길-3]


 [고향으로 가는 길-4]


 [고향으로 가는 길-5]


 [고향으로 가는 길-6]


 [고향으로 가는 길-7]


 [고향으로 가는 길-8]


댓글목록

<span class="guest">감나무</span>님의 댓글

감나무 작성일

애린님
참 예쁜 추억이 듬뿍 묻어있는 고향집에 갔었군요.
아담하고 정갈한 모습이 애린 님을 보는 듯해 반갑네요.

애린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네 감나무님, 지난 5월 고향 방문기를
현재 진행형으로 쓰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 내려가면 화단의 배들도
맛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안개님의 댓글

안개 작성일

작은방 한귀퉁이에 가지런히 서있던 조선간장 네병
이승의 마지막 진을 모조리 짜내며 담았을 어머니의 찐 사랑이
고스라니 전달되어 가슴이 애립니다.

애린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네 . . .참 오랫동안 길이 흐렸는데
세월가면 잊힌다는 엄마의 말씀처럼
고향가는 길이 많이 가벼워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더위 잘 이겨주세요

도토리님의 댓글

도토리 작성일

내 고향은 언제나 그리운 남쪽 나라,
그토록 눈이 부셨던 앞 바다의 푸른 물결,
따뜻한 엄마의 숨결이 머무는 그곳, 고향 집
나의 고향은 아름다운 수채화입니다.

애린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반갑습니다 선우향님
고향과 형제들이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고 축복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라며
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span class="guest">마음만 청춘(새로운 감회)</span>님의 댓글

마음만 청춘(새로운 감회) 작성일

애린님의 구구절절하고 애틋한 고향 방문기 잘 보았습니다
글을 보고 당장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 그리운 곳 내고향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
안개님,감나무님,이승자님께도 안부 전합니다

애린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청춘님! ㅎㅎㅎ
그러실 줄 알았어요
다시 뵙게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청춘으로 오시면
더 반가울 것 같습니다^^

<span class="guest">청춘</span>님의 댓글의 댓글

청춘 작성일

정말 반갑습니다
애린 후배님!
여전히 고향을 위해 동분서주 열심인 모습 넘 좋아요
세월이 너무너무 흘러서 ㅜ ㅜ
지금은 "청춘"이란 별칭이 어울리지 않을거 같아서요
그래서 "마음만 청춘"으로 나왔네요
이 홈페이지 초기인 그 당시에는 제게 그런대로
어울리는 닉네임이었건만...
이곳에서 자주 보게요~ ~ 행복한 시간 되세요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청춘님 만나신 그 세월
제에게도 똑같이 다녀갔어요 ㅎㅎ

안녕히 주무세요^^

<span class="guest">솔향채</span>님의 댓글

솔향채 작성일

물기없는 시멘트 틈바구니에서
예쁘게 자라는 새끼소나무~
안스럽기도 대단하기도한 강인한생명력

고향살이건 타향살이건 모두가 그렇게 강인하게
삶을 살아내겠지요~~

애린님의 고향가는 시리즈가 무척이나 마음에 와 닿네요
좋은글 감사 ^~^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솔향채님...
먼지에 가까운 흙 한 술에
살아있는 것이 너무 신기하여
고향집 도착하면 맨 먼저 생존여부를
확인하곤 했더랬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편안한 밤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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