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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낭구의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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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종희 조회 291회 작성일 22-12-19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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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낭구의 동화/이종희 


요즘 우리 집 동백나무는 꽃을 피우느라 무척 바쁘다. 나는 마치 산파처럼 꽃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해야 할 것 같고, 동백나무는 나무대로 산통을 견디느라 소란스럽다. 


사촌 오빠가 키우던 동백나무 분재가 우리 집으로 들어온 지 어느덧 14년이 흘렀다. 해마다 11월이 되면 나는 동백꽃을 만날 기쁨에 들떠 있다. 


서울에서, 그것도 베란다에서 키우면서 여간해선 꽃을 보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우리 집 동백나무는 잎꽂이 번식까지 성공해 몇 해 전부터 어미와 자식이 나란히 꽃을 피워낸다. 


이들 말고도 친구가 씨를 발아한, 각기 다른 종류의 동백나무가 두 그루 더 있다. 분홍 겹 동백까지 해서 다섯 그루나 되니, 동백나무 부자라는 말을 안 들을 수 없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우리 집을 떠났던 나무들은 지금 어디에도 생존해 있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는 동백나무를 늘리거나 줄이지 않는다. 


어느 날 느닷없이 뚝 떨어진 동백꽃은 지고도 꽃이 되어 사람들의 눈길을 모은다. 이제 막 떨어진 꽃과 서서히 말라가는 수많은 꽃들이 한데 어우러진 붉은빛은 주검이라고 하기엔 너무 또렷하고 강렬하다. 


꽃 진 가지에 열매가 맺히면 꽃눈은 이제부터 배란기에 접어든다. 열매가 여물기도 전에 새잎이 돋고, 반짝이는 새잎 끝에 감쪽같이 잉태된 아기방에 누구도 접근 못 할 막이 생긴다. 


여러 날이 지나도 뾰족하게 밀어 올리지 못한 채, 조그맣게 망울저 있는 게 보이면 꽃봉오리일 가능성이 크다. 그 아기방은 혹한의 추위를 견디는 꽃으로 피어나기 위해 오랜 장마와 폭염을 거친다. 


어느덧 서늘한 바람이 봉오리마다 스치는 계절이 오면 녹색의 딱딱한 표피 안은 완벽한 골격을 갖춘다. 연분홍 피부를 만들고 표피를 밀어내 피어나기 위한 에너지를 저장하느라 바쁘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피어나는 동백꽃을 나는 오래전 내 유년의 고향에서 보았다. 우람한 나무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빼곡히 서 있는 울창한 숲 그늘에 있노라면 비바람이 쉽게 닿을 수 없는 동굴처럼 아늑하고 고요했다. 


그곳을 우리 동네에서는 낭구 밑이라 했고, 그 밑에서 우리는 동그란 고동 껍질이나 돌멩이를 주워 모아 한쪽 손톱이 패이도록 공돌 놀이를 했다. 


기름을 발라 놓은 듯 윤기 난 자리에는 땅속으로 뻗지 못한 뿌리가 돌출되어 있었다. 그 뿌리는 우리가 앉아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낭구 밑에서는 쉽게 하늘을 올려다볼 수도 없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해도 소리만 요란할 뿐, 웬만한 비는 침투할 수 없었다. 좀처럼 그치지 않는 비가 내릴 때는 사방의 흙 비린내가 낭구 밑으로 일제히 들어왔다가 흩어질 때서야 내 머리 위에 제법 뭉툭한 빗방울이 떨어지곤 했다. 


동백나무 위에도 우리가 놀 자리가 있었다. 어른들이 만드셨는지 아니면 동네 오빠들의 솜씨인지, 굵게 뻗은 가지 위에 밧줄을 얼기설기 엮어 둔 자리가 있었다. 친구들과 참새처럼 재잘거리며 놀아도 하나도 위험하지 않았고, 익숙하게 자리를 옮길 수도 있었다. 


그러다 지루할 때면 가지와 가지가 연결된 길을 따라 다른 나무로 옮겨 다니기도 했다. 누가 건들지 않았는데도 너무 높아서 저절로 발바닥이 간지러워 멈칫할 때도 있었다. 


손을 뻗어 동백 열매의 돌연변이로 생겨난 춘북을 따먹기도 했다. 하얀 춘북은 떫은맛이 살짝 가미된 상큼하고 싱그러운 맛이었다. 


그 나무 아래로는 기다란 그네가 놓여 있었다. 용기 있는 아이들은 그네에 앉은 채로  다리를 뻗어, 끄트머리에 한데 뭉쳐진 동백 잎을 힘차게 차 보는 스릴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동백낭구 그네는 전망 좋은 윗마을 비탈진 곳에 위치해 있어 높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아찔한 기분이 고도를 향해 줄달음치곤 했다. 시계 추처럼 씩씩하고 다부지게 움직이며 바다 풍경을 끌어당겼다 놓아주기를 반복하였다. 


어느 날인가는 낭구 밑에서 놀고 있다가 동네 아이가 울면서 '엄마'를 부르며 친구네 돌담 모퉁이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아이가 사라진 돌담 모퉁이에서 갑자기 내 안의 슬픔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양 갈래로 나뉜 동백나무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아랫마을로 난 길을 한참 동안 내려 보다가 아득해지고 말았다. 문득 깨어 보니 내 다리 하나가 갈라진 동백나무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다리를 아무리 앞으로 잡아당겨도 빠지지 않자 흥건하게 고인 내 울음보가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다. 울면서도 '나는 지금 할머니랑 살고 있으니까 할머니를 부르며 울어야 하나 살짝 망설이기도 했다. 


결국 어른들이 몰려와 나무 한쪽을 베어 내고서야 나는 나무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섬마을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마자 부모님께서 나와 오빠를 여수로 데려가면서, 처음으로 동백낭구와 헤어졌다. 


동백낭구 곁에서는 도시로 떠난 부모님 생각에 슬펐고, 부모님 곁에서는 동백낭구 밑이 그리워 외로웠다. 곁에서나 떠나서도 그리움의 공간이던 동백낭구는 우리 가족이 모두 섬마을로 복귀하면서 그리움에 절뚝이던 시간도 시들해갔다.


  동백꽃은 밖으로 핀 꽃보다 비바람과 강한 볕이 닿을 수 없는 자리에 피면 더 곱고 예뻤다. 두껍고 빼곡한 잎들을 비집고 볕이 살짝 닿기만 해도 꽃은 예닐곱 소녀의 상기된 볼처럼 투명하고 맑은 홍조가 배어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동백꽃을 본 것은 동백낭구를 빠져나가는 아치 터널을 지나 숲으로 난 길에서였다. 우연히 좁은 황톳길에 떨어진 분홍색 동백꽃을 발견하고는 주위를 살피게 되었다. 얼마 안 가 그 꽃은 친구네 밭, 울타리로 심은 동백나무의 꽃이라는 걸 알았다. 


빨간 동백나무가 즐비한데, 유독 나무 한 그루에서 분홍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당장 친구에게 이 말도 안 되는 꽃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친구네 집까지 급하게 뛰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분홍 꽃의 존재에 놀라서 그랬는지, 숨이 턱까지 차올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내 친구는 너무 태연하고 시큰둥했다. 그때의 실망감이란...... 


그 후 나는 오랫동안 분홍 동백꽃 존재를 내 은밀한 비밀처럼 누구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동백낭구의 동화는 초등학교 졸업 후부터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같이 놀던 친구나 비슷한 또래는 서로가 다른 길을 위해 떠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무 허리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 가지를 힘차게 끌어안으면 반동으로 쉽게 오를 수 있었던 나무도 바닥에서 엉덩이를 끌어당기는 바람에 더는 오를 수가 없었다. 


가을이 깊어 동백꽃이 벙그는 준비를 하는 동안 동백 씨는 떨어질 준비를 한다. 저절로 두꺼운 껍질이 벌어지는 샛바람 부는 날에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던 나무도 왁자하다. 마른 동백 잎이 쌓인 바닥으로 누군가 장난으로 작은 돌멩이를 던지는 것처럼 동백 씨는 탁탁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아낙네의 쪽 진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른다는 말은 들었어도 그때는 여기저기 동백 씨가 수북해도 무심했다. 그런데 요즘은 동백기름의 활용가치가 높아 수매를 다한다니 반갑다 가도 주울 사람이 없는 현실이 어쩐지 아쉽고 서운하다. 


이제 내 고향 낭구 밑은 아이들도 없고 반지르르한 공돌 놀이 판도 없다. 어디 그뿐인가. 시절 따라 동백낭구 숲도 많이 변했다. 


그 모든 기억을 보상이라도 하듯 고향으로 난 길은 너무도 반듯하고 당당하다. 그럼에도 내 고향 동백꽃만큼 가슴 떨린 꽃을 못 만나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때가 있다. 


편애의 수렁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한다 해도 내 기억 저편 동화는 아직도 선홍 빛을 잃지 않고 있으니까.

  (2020.11.15) 

 

댓글목록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

애린 작성일

2년 전에 스마트 폰으로 써 두었던 글
너른 마당으로 옮겨왔습니다.
새로운 한 주에도
모든 고향분들 화이팅하세요^^

<span class="guest">산벚나무</span>님의 댓글

산벚나무 작성일

스치라고해서스칩니다.ㅋ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산벚나무님은 이 추운 날
초포 바닷바람 맞지 마시고
따땃한 온돌방에서 읽으셔도 좋아요 ㅎㅎ
안도 상산동 둘레길 사진 사진방에 올려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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